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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하나 또 뜯어냈다. 이젠 뒤로 두 장 남았음이다.
풍경 없는 달력,
숫자로만 이루어져 건조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생각을 곱게 모아 보기로 했다.
둘째의 하숙비와 용돈을 보내야 하는 날,
큰 얘의 2차 등록금을 보내야 되는 날,
막내의 생일이 들어 있고, 그 사람 생일이 표시되어 있고,
어머님 집의 정수기 필터 가는 날 또한 찬찬히....
달력을 들여다 보는 일 만으로
시월의 첫 날, 벌써 한 달을 다 지나보낸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동생의 친구에게서
스물 셋 먹은 큰 아이 자궁경부암 2차 주사 맞을 날짜라고 연락이 왔다.
내키지 않았지만 아빠가 암으로 떠났으니 예방해 두어 좋을 것에
망설임 조차 없게 된 사고방식 또한 그가 남겨주고 간 선물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추석날 아침 이후 지독한 고집으로 무장한 아이들과 나는 말을 끊고 있는 중이니
어떻게 말을 전한다?
어느새 12일째가 되었다.
스무살이 넘었다는 당당한 기세로
무슨 수로든 제 의견에 옳음표를 달고 그야말로 박박 엄마를 긁어댔다.
엄마 하나 눌러 보고자 단합을 했던 나의 아이들,
괘씸함이 배가되어 이번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노가 참 오래도 갔다.
왠지 아이들에게 처절하게 당했다는 느낌,
어찌 그리 내 자신조차 알 수 없을 나의 성격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것도 조목조목 바르게도 지적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반박할 명분까지도 사그라들게 소심한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받았던 충격, 자식 시집살이가 이토록 매운 것인가, 참으로 독했다.
이대로 너희들과 끊어진데도 미련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중학생인 막내는 그 중 이단아로 엄마에게 예전보다 더 살가와졌다.
시간과 공간이 셋을 뭉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둘째는 대전, 큰 얘와 막내는 함께 있긴 하지만 일곱살의 세대차이란
얼마든지 언니들을 배반할 수 있을 나이.
가까이 없으니 전화로 다시 뭉칠 수도 없고,
큰 얘와 나는 불편함 반, 모른체 무관심 반으로 잘 살아내고 있기를....
과연 누가 먼저 이 살얼음판 적막을 깨트릴 것인가?
짱짱하게 양보할 명분 또한 괘씸함을 앞서지 못할만큼
상처뿐인 영광? 그 영광의 날을 고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
처음엔 오기였다가, 그 다음엔 포기였다가, 그 다음은 익숙함으로 영영 멀어질까도
고민이 되긴 했다.
적당한 시기에 동생의 친구가 해답 하나 던져준 꼴이다.
늦은 저녁 현관문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모른체 힐끔 둘러보는 것 같더니 제 방으로 잽싸게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거실에서 노숙생활하는 엄마가 어서 잠들기를 바랄테지.
역시나 기회는 또 어긋났다.
아이와의 불통을 끊어내기 위함 보다도 동생의 친구와의 약속이 더 급한 나,
방법이 없다.
내 출근시간을 늦춰 잡았다.
그리고 "세인, 이모한테 전화 좀 해 줘라." 짤막하게 말을 건넸다.
- 알고 있어요. 연락했어요.
"전철역까지 태워줄께."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큰 얘가 대답을 안 했기 때문에 이 다음은 어떻게 풀려갈지는 모를 일이다.
침묵으로 엘리베이터 안의 모녀는 뻘쭘했다.
1층에 내리자 마자 아이가 앞으로 뛴다. 난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가야 하는데, 아이가 저만큼 가 버렸다.
"차 저기 있잖아. 타고 가."
- 어디 있는데.
아이도 엄마만큼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까?
자동차 시동을 켜는데 옆 좌석의 큰 얘가 말을 한다.
"엄마, 나랑 사귀는 오빠 다음 주에 미국 출장 간대.
그리고 연고전 구경 갔는데, 재밌더라. 역시 고대는 악착같이 똘똘 뭉치고,
연대는 각자 움직이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물어 봤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다. 재밌었냐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화해는 그저 이렇게 느닷없을 순간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이라고
멋적은 웃음 한 번 웃습니다.
출처 : 짧은사랑 ♡ 긴 이별글쓴이 : 김민자 원글보기메모 :'나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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