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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열무김치
    나의 글 2013. 8. 27. 18:20

    먹을 사람도 없는데 어머님은 여전히 그곳에 고추를 심었고,

    가늘고 맵씨좋은 가지를 수확했고, 깻잎, 상추, 튼실한 호박도 서 너개.....

    어머님의 옥상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예전만은 못해도 챙겨 온 보따리에 싱싱한 각종 야채의 모양만 봐도

    울퉁불퉁 모난 것이 없는 걸 보면....   어머님이 겪어낸 슬픔의 노하우는

    어리버리한 나 보다 한 수위 임이 분명하다.

     

    아이가 새벽부터 열무김치를 가지러 가야 한다고 혼잣말을 했다.

    네 시였다.  자는 중에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웅웅거리던지 벌떡 일어나 거실 불을 켰다.

    휴대폰을 가방 속 생수통에 풍덩 빠뜨려 잔뜩 심란해 있던 큰 얘가

    잠을 못 이루던 중이었다.

    "엄마, 만약에 내 갖고 있던 스마트폰이 이대로 잠수를 타 버리면 과연 누가 날 찾을까?

     그럼에도 내 거처를 찾아내 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친구이겠지?"

     

    - 따로 수첩에 메모해 둔 것도 없을텐데.....   

       너무 믿어서 단지 전화번호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라면 암담하긴 하겠다.

     

    "하긴 할 수 없지.  나를 누구도 찾지 않는다 해도....  엄마, 내가 너무 오픈했나봐. 그 오빠한테

     한번은 물어봤지.  어느날 나와 연락이 안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고.

     그랬더니 동생 1, 2한테 소식을 확인하면 된다길래,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엔 어떡할까?

     난 오빠의 전화번호 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물어볼 수야 있었지만 굳이 그리 하고 싶지 않았거든.

     문득 스마트폰이 물을 먹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네."

     

    - 그랬더니 그 얘가 뭐라 그러데?

     

    "그냥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하대."

     

    싱숭생숭한 큰 얘는 당분간 스마트폰 없이 지나가 볼 거라 했다.

     

    아이의 사랑이야기가 이젠 거부감이 없어 좋았다.

     

    사무실에 갔다가 다시 아이를 태우러 집으로 향했다. 

    다른 것은 버거워도 할머니집에 엄마의 대체수단이 된 아이를 데리고 오가는 것은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쇼핑백에 가득 담긴 빈 락앤락 그릇을 챙겼다.

    야쿠르트에서 나온 윌 음료도 서너개 챙기고,  아름이네서 사 온 참외 한 봉지도 챙겼다.

    엄마보다 할머니의 정이 훨씬 많은 아이들에게서 가끔은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하나로 다른 곁가지는 과감히 쳐 내기로 한다.

     

    큰 얘가 차에 올라타면서

    새벽녘,  제 심사가 뒤틀렸던지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부치던 때와 다르게 엄마를 다정하게 부른다.

    갑자기 엄마가 안쓰럽게 보였나.

    "엄마, 고모들이 셋이지만 할머니 용돈 드리는 분은 없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아빤 참 착했어."

    어머님께 드릴 돈을 김치 냉장고 위에 두고 깜박 그냥 나왔다.

    급하게 차 안에서 허름한 봉투 하나 찾아 그 액수만큼 다시 채웠다.

    아이가 돈을 왜 주느냐고 말리지 않았다. 

    "이따 들어갈 때 이것 꼭 챙겨라."

     

    골목 바로 앞까지 가서도 아이만 들여 보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일이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나,   곧 돌아올 추석이 버겁다.

     

    언제나처럼 아이는 들어가 점심 한 끼를 할머니와 함께 할 것이고

    나는 다시 볼 일을 보고 그 골목을 들어설 것이다. 아이가 가슴 가득 안고 나온

    물김치 한 통, 호박 하나, 붉은 고추, 파란 고추 한 봉지 얌전하게 차 뒷좌석에 앉혀 놓았다.

    할머니가 주신 것이니 귀하디 귀한 것이라고 아이가 말했다.

    대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 법도 하건만 절대로 어머님은  실수로라도 바깥 걸음을 않으신다.

    나에 대한 배려라는 것 쯤, 아니 서로에 대한 배려가 된 것을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부비고 터지고 한 집에서 깔깔대던 웃음은 적막함으로 바뀌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그 집을 그리워 하고,

    처지에 알맞게 웃음도 절반으로, 울음도 절반으로 절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짧은사랑 ♡ 긴 이별
    글쓴이 : 김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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