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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에 글씨 큰 달력을 매년 3백부를 맞췄다가,
다시 2백부로 맞췄다가 이번엔 백 부만 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견물생심이라고 한가득 쌓여 있는 걸 보면
하나만 가져 갈 것도 두 세개를 덥썩 집어 가게 마련이어서
나름 머리를 썼습니다. 양이 적으니 개당 가격이 좀 비싸지긴 했지만서도.
며칠 전 달력이 왔길래,
경비 아저씨 몇 부 드리고, 관리소장 한 부 드리고
옆 건물에 있는 노인정에 계신 분들이 알면 분명히 달라 하실텐데
일부러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니까.
알게 모르게 자꾸만 줄여가는 연습을 하게 되는 듯 합니다.
냉장고 안 가득찬 음식물도 보기에 버거워,
텅 비워질 때까지 시장보기를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먹기 좋은 놈으로만 먹자면,
뒤에 쳐져 덜 맛있는 놈은 쪼그라들다 지쳐 이내 버려질 터이고
하나씩, 둘씩 없어지는 걸 봐 가며 채우는 것도 꽤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채워야 할 것은 아니지만,
비어진 속을 보니 얼마 전 건강검진 받는다고
하룻동안 텅텅 거렸던 내 속과 같기도 합니다.
사노라면, 모든 지혜가 내게 있는 것도 같고,
바보 천치가 되어 알만한 것도 몰라서 허둥대기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
요즘 제가 그렇습니다.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상속세 문제로 마음 고생을 하다가
나름의 서류를 정리해서 담당에게 갔었지요.
"1차 서류 검토를 해 봤으나 별로 신통치 않고,
어디 이번에 갖고 온 것도 또 훑어보겠지만, 원하는대로 되긴 어려울 듯 해요.
최선을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드러나는 정황상 무조건 이쪽 손을 들어 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어떻든 이번으로 마무리 지읍시다.
12월까지는 정리해서 통지를 할 거예요."
- 왜요? 더 조사할 것이 없나요?
감출 것도 없이 투명하게 드러난 모든 것들이 그들의 손에 있는데
내가 가져간 것들은 그저 확인 차원일 뿐.
원리원칙에 근거해서 일을 하는 공무원을 무슨 수로 ......
나름 부탁한다며 들고 갔던 카스테라와 윌 다섯병이 갑자기 우스워졌습니다.
지난 번에는 사온 것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다니.
이럴 땐 차라리 일자 무식한 여편네였으면 참말 좋겠건만,
대책없이 억지를 쓸 수도 없고,
딱히 내세울 수 없는 명분이란 것이 이 자리의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
그냥 "잘 부탁드립니다."만 하고 나왔습니다.
무작정 내게 이로운 일만 생길 것이라 믿고 살지 않은 탓에
그럼에도 홀가분한 것은 있습니다.
몇 달 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차 한 쪽 귀퉁이 서류 뭉치를
이제부터는 다시 안 보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혹시나 하며 붙잡아 두었던 그 종이들이 마치 돈이라고 생각을 했었는지
한가닥 꿈을 꾸었거든요.
소용없게 된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자.
처음부터 내 것이 안 될 것이었나 보다. 아주 쿨하게 마음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함으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비워지고 나면 처음처럼 다시 내 힘으로 살면 됩니다.
출처 : 짧은사랑 ♡ 긴 이별글쓴이 : 김민자 원글보기메모 :'나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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