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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불려 놓고 나왔던 미역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퉁퉁 불어 올라 있지 않은 걸 보면 미역의 질이 좋은 것인가?
아직 저녁 여섯 시가 안 되었으니 천천히 해도 괜찮다.
우선 씽크대 주변부터 정리를 하고 미역을 세게 빨아
구멍 숭숭 뚫린 바구니에 받쳐 놓았다.
가스불 위로 냄비 하나 걸쳐, 참기름을 휘휘 둘렀다.
미역을 함께 넣고 달달달 볶은 뒤 찬물 한 바가지를 부었다.
일부러 쇠고기는 넣지 않았다. 미역국은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미역국이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잘도 끓어 올랐다.
그럼, 이제부터 불고기를 재어 놓아야 할 것인데,
느닷없이 나는 빨래 건조대의 마른 빨래들이 급하게 신경이 쓰였다.
주방에서 하던 일을 그냥 두고, 차근 차근 빨래를 접었다.
이것 저것 할 일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양파를 갈고 배를 갈아 알맞게 간이 배도록 양념을 한 불고기를
냉장실에 밀어 넣고
다시 세탁실로 옮겨와 밀린 빨래감을 지금 돌릴 것인지 말 것인지 잠깐 고민을 했다.
에라, 그냥 두자, 조금 더 있다 모아서 한꺼번에 하기로 하자.
대충 정리가 될 즈음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큰 아이가 들어섰다.
"엄마, 나 지금 할머니랑 고모랑 판교역 고기 집에서 저녁 먹고 왔어요."
아이의 손에 쇼핑백 하나가 들렸다.
용돈과 갈색 니트 가디건 하나 선물로 받았단다.
아이의 생일.....
털퍼덕 힘든 표정으로 쇼파에 앉아 주저리 주저리 할머니 고모와 함께 나눴던 대화들을
요약해서 내게 전한다.
불고기와, 미역국..... 소중한 엄마의 마음은 하찮게 쓰레기가 되어 풀풀 흩어졌다.
이 순간, 어떤 말로 어색한 공백을 이어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말도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 " 뭐 어떠냐"로 응수할 것이고
두 눈을 치켜 뜨고 화를 낸다 치면 아이에 의해 나는 역시나 이상한 엄마로 낙인이 찍힐 것이고,
그럼에도 감정은 언제나 이성을 앞질러 성을 참아내지 못한다.
기어코 난 또 포악을 떨었다.
"아휴, 또 시작이다. 할머니와 고모랑 친할 수 밖에 없을 환경은
엄마랑 아빠가 만들어 놓은 것이잖아요. 굳이 우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맞벌이만 안 했어도 이렇지 않았을 건데, 우리보고 어쩌라구...."
억측은 언제나 궤변일지라도 정상참작이 되게끔 변신의 귀재로 탈바꿈을 한다. 기막히다.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내 마음대로 주물러 지지 않을 먼 발치서 까딱까딱 심장을 오그라트리며 주저앉게만 할 뿐....
"그때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어떡할 거였느냐?
너희들만 끼고 살고 싶었지만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저당잡힌 자식과의 유대관계를 이제쯤 되찾아 오려 했다면 그것이 욕심인 거냐?
결국, 너희들은 그 중 하나를 잃은 것 뿐이고, 난 모두를 잃은 걸 자꾸 확인 할 뿐이다."
이 또한 부질없어졌음을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서툰 넋두리 다시 치밀어 올랐다.
다시 시작일 뿐인 귀찮은 소리가 듣기 싫은 아이는 제 방으로 조용히 떠나갔다.
미역국 한 그릇 가득 담아 밥을 말았다.
쟁반에 받혀 신 김치 하나에 꾸역꾸역,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부러 용을 쓰고 먹어댔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풀 수가 없을 이 소용돌이...
나 하나만 꼬여진 심사 온전해 지면 될 일인데 그게 그리 어렵다.
출처 : 짧은사랑 ♡ 긴 이별글쓴이 : 김민자 원글보기메모 :'나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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