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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경험이란 것이 사람의 마음을
잔잔한 동요마저 잠재운채 이토록 잔잔하게 만드는가?
더불어 어떤 경우에 화를 내야 할지조차 까마득해졌다.
언제던가 엄마가 넋두리처럼 했던 말 중에
"살다가 중치가 막혔다라든지
아닌 것이 긴 철로..."어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도 없이
하도 기막힐 때 절로 내뱉던 소리들이 내게서 삐져나오다니.
외면하고 무시할 수 없을 삶의 파편들이 정겹게 내게로 왔다.가끔은 순화되지 않은 언어가
오히려 진하게 걸친 막걸리 한 잔처럼
서늘한 심정을 잘도 대변해
싫지 않은 회상, 그렇게라도 엄마의 냄새가
녹록지 않은 삶의 일부분 간간한 위로가 되어지는구나.
깜박했었다.
다빈이를 등교시키려고 급하게 서두를줄만 알았지10시에 수원지방법원에 가야 할 것을...
자재미수금 문제로 처음부터 참 답답했던 거래처 남자는시작과 마무리를 역시나 깔끔하지 못하게
법원으로 성가신 출석을 반복시키고 있다.
억울해서 끝까지 항소를 하면 분명히 이길 수 있다고 누군가 부추김이라도 있었나?
그저 혼자 생각이지.
세상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면 부질없을 것을 알 터인데.
도대체가 귀를 닫고 사는 사람이다.
백운호수를 한참 지나 원터마을 내리막길에서
마침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직 시간도 넉넉하고...커다란 바나나 한 개를 오물거리며
그 짧은 시간에도 게임을 놓지 못하는 막내.
하도 생각이 복잡해 멍한 상태로,
"게임이 재밌니?" 물었더니
- 응, 머리 회전 발달시키는 중!
언제나 대답이 간략한 것이 자식의 말이어도
흐뭇한 기운은 충분해서 좋다.
이르게 도착한 법원 법정동 416호 조정실 앞에서 옆의 여자는
처음의 나처럼 죄지은 것도 없이 두근두근 떨린다며
전화기에다 누군가에게 연신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법원이란 곳이.....
나는 이렇게 의연한데.
세월의 힘이 이렇게 대견하다.
정해진 시간 10분이 지나고 다시 10분이 흘러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판관이 미수금을 이미 받았다는 내 이야기를 잠시 듣더니
그럼 이만 종결지어도 되는 사건이네요. 라고 했다.
"제 경우엔 그렇지요."
- 그럼, 그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으니 다음 번에 한 번 더 출석해서 결론내지요.
아니면 전화해서 서로 통화를 해 보든지. 자꾸 시간내기도 어려운데.
"예,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헐레벌떡 남자가 나타났다.
무슨 소리냐고 자기는 끝까지 항소를 고집하는 중,
"그런데 시간이 지금 몇 시예요? 기다리는 사람 피해를 잔뜩 주고는..."
그럼에도 말 같지 않은 말을 계속 하자,
재판관이 한참동안 답답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도대체 억울할 것이 뭐요? 외상으로 물건을 쓰고 갚았으면 되었지,
그동안 비싸게 썼다고 항소를 하다니, 그럼 진작에 거래를 말든지,
그리고 여기는 법 상담을 해주는 곳이 아니니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다시 듣고 와요.
판사가 괜히 그런 판결을 내렸겠소?"
도대체 분별력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 남자는 제 사업을 어찌 이끌어 가는가?
자신의 정당함을 왜 몰라 주느냐는 눈빛으로 멀뚱히.....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것을 당신은 왜 그리 아둔하게 모르는가?
그러든 말든 나는 돈을 받았으니
그 사정까지 안타까울 인정은 더 이상 필요없다.
재판관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되도록 빨리 법정을 빠져나왔다.
세상 답답한 남자를 이해시키는 일이 내 책임은 아니니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두려울 것도, 복잡한 일도 세월의 힘에 눌려 어느날인가엔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2015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