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랩]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사진방 2018. 9. 14. 11:42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도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 차가와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 흘렀을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출처 : San Francisco 의 향기글쓴이 : June 원글보기메모 :'사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비 오는 날의 기도 외 (0) 2018.11.13 [스크랩] 노년은 슬퍼할 문제가 아니다 (0) 2018.10.23 [스크랩] 짧은 삶, 긴 고통, 오랜 기쁨 (0) 2018.08.30 [스크랩]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0) 2018.08.20 [스크랩] 난 너에게 / 이정하 (0) 2018.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