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운명
포항에서 이틀을 신세지고 왔으니, 이번엔 자기 차례라며 둘째가 그 친구를 데리고 온단다.
재수학원 친구,
며칠 전부터 "포항처녀"라고 별명 붙인 친구의 가정사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면서,
"엄마, 그 얘네 부모님은 1년 전에 이혼을 했대.
엄마는 오직 집 밖에 몰라서, 쓸고 닦고, 꾸미고 시어머니 모시고 오로지 순종 그 자체였는데
어느날 통신대에 입학하면서 바깥 세상을 알게 되었나봐.
아빠는 공무원으로, 먹고 살 만한 집인데 깐깐하고 꼼꼼해서
늘 자신의 휴대폰을 잠금으로 해 놓는 사람으로...
그런 와중에 우연히 엄마의 휴대폰을 살펴보게 된 아빠가
이상한 문자를 발견했나봐.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에서 애인들이나 하는 대화가 많았던 거지.
그날 그 얘의 집 상황은 사랑과 전쟁 드라마처럼 난장판 자체였고,
엄마는 그날로 뛰쳐 나가, 지금은 이혼 상태...."
그 날 친구는 아빠 엄마의 방에서 칼을 보았단다.
순간 깜깜한 어둠이 침묵을 만들고 있었다.
- 그럼 엄마는 지금 만나고 있대? 살림은 누가 해주고?
얼만큼 싫어지고 미워져야 이혼이란 걸 할까?
"할머니가 집안살림을 하는데 엉망이지. 엄마를 가끔 만나긴 하는데,
처음엔 너무 너무 엄마가 역겨워서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이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빠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긴 하고...
자신의 결혼관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
과연 어떤 남자를 만나야 행복이 유지될 수 있는건가.
자기네 집도 별 탈 없이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풍비박산이 난 걸 보니 장담할 수 없는 미래라는 거야.
엄마,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행복은 어느 순간 깨질 수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더 신중하게 살아야 하는 거지요?"
"엄마, 그 친구와 내 경우가 비슷하게 우울하지만 같지는 않다 생각을 해요.
우리집은 파탄이 난 게 아니잖아요?
엄마랑, 아빠가 정말 열심히 살다가 한 사람이 아파서 떠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우리는 정말 피치 못할 상황인 거예요."
- 그래, 엄마는 너희들이 있어서 정말 좋다.
대학 입학을 앞둔 둘째의 속마음이 엄마를 울린다.
"수련아, 엄마가 무엇을 해 놓을까? 엄마는 일찍 나가야 하는데...
김치찌개, 북어포 양념구이, 김...."
해줄 반찬을 쭈욱 나열하면서 아이의 표정을 보니 입이 웃고 있다.
들여다 보면 다 아픔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아픔의 원인이 누구라고 지목할 수 없으니
그저 간단하게 운명이라 끝을 맺지 않고서야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