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불행하다는 생각과, 슬프다는 생각은 엄연히 다르다!
말 끝에다 기어코 불행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진 말도록.......
차라리 지난 아픔은 잠시동안만 슬픈 시간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덜 무거워 보일텐데,
아이 중의 하나는 습관처럼 자신들에게 불행이 닥쳐왔다고 했다.
지난 일요일 오후,
집 근처 회전 초밥집에서 모처럼의 외식이라고 아이들이 엄마를 불러냈다.
엄마는 여전히 바쁜데,
알 바 없을 아이들의 생각은 보이지 않는 수고에 대해서 아랑곳 없는 것인지.
엄마의 삶을 제대로 파악할 나이가 아니라 그럴테지. 또 그리 넘어가 보자.
대전 둘째가 막내 영어 공부를 봐 주느라 왔다가, 곧 가야겠으니 어서 오라고.
밖에서 질펀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여전히 어색한 아이들과의 따로 만남은 그래서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막내가 몰래 몰래 랩을 하는데, 어느 곳에서 10만원이란 상금을 받았다나?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묻지 않는 이유는
암암리에 하는 취미로 그냥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우선 순위와 후순위를 스스로 챙겨가도록 두는 일도
본인의 책임이 되어지게, 내 생각이 그렇다.
보기에 늘 어설프고,
세상을 모르는 엄마라고 치부하기 잘 하는
잘나디 잘난 나의 아이들이 바라보는 엄마란 사람은 무심한 사람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영악하게 사는 법을 누구라고 모르나?
가쁜 숨 몰아쉬고 달려가 본들,
우리가 꿈꾸는 행복이란 닿을듯 말듯한 지점에서
약을 올리며 안개 속으로 흩어지지 않던가?
아이들은 갈수록 화려하고, 더 더 멋진 곳을 찾는다.
먹을 것, 입을 것 말고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향한 갈망으로,
엄마된 시선으로는 여기서 그만 감사를 깨달았으면 참말 좋겠다는 간절함이 가득한데
멈추지 않는 삶의 욕구는 그만한 나이여서 그럴 것이라 위안을 삼고 만다.
맛나게 먹은 음식에, 깔깔 대며 날려댄 웃음은 어쩌라고
심드렁한 순간을 못 견딘채, 뾰족하게 솟아오른 송곳이 되어
마땅치 않은 부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려진 후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자식이란 탓을 찾기 위해 태어난 염탐꾼의 눈이 되어
엄마의 이 곳 저 곳을 살핀다.
사는 날까지 무사 안전한 자리가 자식이려니,
그것을 믿지 않음은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이다.
민들레 홀씨처럼 폴폴 불어 날려 보내면 그 뿐인....
꼭꼭 부여잡고 있은들, 그들과는
새벽녘 코끝에 스치는 시린 바람의 냄새,
함께 주고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아직은 아니어 서러워도
자식의 자리는 먼 발치에서 바라봄의 그것이다.
급속히 가까와졌다가 팽 돌아서는 배반감에 속이 상할대로 상해도
어미가 자식을 겉 낳았지, 속 낳았나?
나와 다른 마음이라고 분노도 그만 두자.
엄마의 자리가 벼슬이 아님에
뒤치다꺼리 실컷 하는 자리라면 헛헛한 웃음 삭히고 가는 수 밖에.
바쁜 와중에 아침 저녁으로 학교까지 오가 주는 것을
엄마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오류다.
단순하게 그 시간만 따지자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온종일 염두에 둔 채 떨쳐낼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염려를 알 턱이 어디라고?
억지를 쓸 테면 쓰라고 했다. 니들이 누구한테 만만한 투정을 할 것이냐? 거기까지다.
엄마의 귀한 시간을 함부로 여기고 있었다면,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가라고 냉정하게 일렀다.
"물론, 그럴께요."
그리고 나는 이틀째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떨쳐내고 난 이후, 안쓰러움에 불안할 줄 알았던 마음이 비교적 홀가분하다.
둘러보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물며 감사를 깨닫지 모른채 살 거라면
누리던 것조차 빼앗겨질 것을 느끼기도 해야지.
너희들에게만 있는 권리, 엄마에게도 분명히 있음까지.
절대로 자식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다짐은 끝없는 모성애와는 다른 관점이다.